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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1914년~1918년 사이에 일본 육지측량부에 의해 1:50,000 지형도가 간행 되었다. 이들은 1등도로-2등도로-달로-연로-간로-소로로 주요 도로망 등급을 규정 해 놓았다. 식민지 관리와 자원의 수탈을 위해선 먼저 지도를 만드는게 순서였던가. 세금을 수탈하기 위한 지적도도 얼마나 꼼꼼하게 만들었으면 지금도 당시 만들어진 지적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을 정도다. 어쨌든 이 지형도를 통해 옛 산길에 대해 탐구를 시작해 보자.

 

산길탐구 1편 : 오도재 '지리산 가는길 도로'

 

조선시대, 한량한 선비들이나 유명한 산과 들을 오가며 유랑을 했고 시도 지어서 읊었겠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러한 여유는 없을터이다. 그런 그들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넜던 이유는 마을을 왕래하거나 교역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1:50,000 지형도에서 주목할 부분은 연로와 소로이다.

 

연로는 잇닿은 길, 즉 계속 연결된 길을 말한다. 현재의 지방도로라고 하겠다. 소로는 좁은 길을 뜻 한다. 현재의 마을길이라고 하겠다. 운송수단이 발전하고 굳이 옆마을과의 직교역이 필요 없어진 지금은 소로라는 도로망이 등산로나 트레킹 길로 변화되고 있다는데 주목을 하자. 연로 또한 지금은 사장되었거나 등산로로 변화된 곳도 주목을 해 보자.

 

소로는 보통 고개를 넘어 옆 마을로 연결된다. 산의 능선을 넘는다는 말이다. 현재의 등산로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등산로와 다르다. 우마의 이동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옆 마을에 소를 팔러 가야하는데 등산로와 같은 길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옆마을로 통하는 가장 가깝고 편한 계곡을 통해 산 능선까지 올라갔다가 고개를 넘어 다시 계곡을 통해 내려간다.

 

▲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 등구재(출처: 규장각)

 

위의 일제 육지측량부 1:50000 지도를 보면 좌측 당시 운봉 산내 상황리에서 등구재를 거쳐 함양 마천 창원리로 넘어오는 점선으로 된 소로길이 보인다. 현재 이 소로는 지리산둘레길 '꽃가마타고 시집가던 길'이 되었고 수많은 여행객들이 지나가는 숲길이 되었다. 예전 도로였던 관계로 현재도 등구재 가깝게 이르기까지 농사를 짓고 있거나 묵혀둔 전답들이 많다. 물론 현재와 비교해 길이 똑 같다고는 볼 수 없다. 아니, 다른 부분이 많다. 10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는데 하물며 100년이 지났다.

 

소로로 분류되는 옛 도로, 옛 길의 특징을 지형도에서 자세히 보면 능선을 타고 가지는 않는다. 큰 계곡, 작은 계곡 그리고 산 사면길로 나 있음이 보인다. 비단 이 구간만이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서도 똑 같이 형성 되어 있다. 현재의 등산로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숲길이 아니라 산 정상으로 향하는 가장 짧은 구간 또는 산맥, 연봉 종주를 위한 능선구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등산로의 기점은 계곡으로 되어 있을지라도 이내 능선으로 올라 정상을 향해 간다.

 

옛길, 즉 소로를 이용한 등산로의 경우 능선부 고개에 도달할 때까지 아주 편한 산행을 할 수 있다. 수백년 동안 그곳에서 살아갔던 선조들은 이미 이러한 길들을 찾아 내었고 왕래가 많은 곳은 고개 이름을 정해 두었다.

 

▲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휴천면 오도재(출처: 규장각)

 

위의 지형도에는 함양군 구룡리 조동마을에서 지안재를 넘어 독가촌을 지나 오도재에 이르는 연로(실선과 점선)가 표시되어 있다. 교통과 도로가 발전하기 전까지는 이 도로가 함양과 마천을 잇는 주요도로다. 조동마을에는 조선시대 당시 제한역이 있었고 지리산을 찾는 이는 대부분 제한역을 지나 오도재에 오르게 된다. 함양과 마천을 오가는 주민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승려들, 지리산을 유랑하는 선비들 등 많은 이들이 오고갔던 고갯길이다. 조선시대에는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의 길이었고 변강쇠와 옹녀 역시 이 길을 통해 오도재를 넘게 된다.

 

현재는 도로가 만들어져 '지리산 가는길'로 명명 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시대 장사꾼들의 이동 경로를 보자. 조동마을(제한역)을 지나 지안재를 거쳐 해발 773m의 오도재에 오른다. 그리고 촉동, 별악소, 등구동, 창촌동(창원마을), 당흥동(마천면소재지)을 거쳐 백무동에 이른 후 하동바위를 거쳐 장터목에 도달하게 된다. 비단 장사꾼들 뿐이었으랴.

 

▲ 함양군 휴천면 오도재 - 마천면 금계마을(출처: 규장각)

 

위의 지형도를 보면 오도재에서 금계마을로 내려오는 연로(실선과 점선)가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오도재에서 별악소, 등구동으로 이어지는 연로 외에 오도재에서 촉동으로 넘어가 창촌동(창원마을)로 내려오는 소로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지리산 유랑기를 쓴 함양군수 김종직이 일행과 말을 달렸던 길로 추정된다. 오도재에서 말이 가는데로 두었더니 등구사에 도달하였다고 했다. 등구사는 촉동마을 상단의 옛 빈대궐터에 위치하고 있다. 만약 연로를 따라 왔다면 촉동이 아니라 별악소 마을에 도달하여야 한다.

 

창원마을은 마천면내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등을 보관하다 오도재를 넘어 함양으로 옮길 때 사용했던 창고가 있었다. 그래서 창고마을이란 뜻의 창말 또는 창촌으로 불리다가 두 마을이 합해지면서 창원마을로 개칭 되었다. 세월이 흘러 교통이 발달하면서 오도재 길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게 되었고 그 옛날 주요 교통로에 접해 있었던 창원마을, 등구마을 그리고 특히 마을버스 조차 들어가지 못했던 촉동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마을로 변했다.

 

 

그러던 중, 1988년 부터 2003년까지의 오도재 도로공사를 통해 지리산 가는길이 개통 된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길 100선에 소개 된 지안재에서 오도재로 오르는 구불 구불한 도로, 오도재에서 마천까지 하봉, 천왕봉을 거쳐 반야봉에 이르는 지리산 대부분의 주 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지리산 파노라마 도로가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 옆 계곡 건너 아직도 옛길이 남아 있다.

 

사실 현재 개통되어 있는 오도재 도로는 연로 보다는 오히려 소로였던 곳에 가깝다. 조선시대 지리산을 오갔던 길 말이다. 오도재-등구마을-창원마을로 이어지는 연로의 경우 현재는 길의 흔적은 뚜렷하나 잡목, 잡초가 무성한 길이 되었다. 다만 길목 곳곳에 묵은 전답만이 쓸쓸하게 방치되어 조선말기의 주요도로였음을 희미하게나마 알려주고 있다.

 

연로는 현재 지방도로 등으로 대부분 바뀌었으나 소로는 이제 유명무실화 된 길이 많다. 마을과 마을을 이동하는데 있어 굳이 고개를 넘어갈 필요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소로들은 아직까지 유효하며 등산로가 된 소로도 있고 트레킹길이 된 소로도 있다. 이러한 소로를 걸어보며 옛 선인들이 남긴 지혜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 미래의 꿈을 꾸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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